류성룡이 징비록을 쓴 이유

신병주 교수 류성룡이 면천법, 무역에 대한 아이디어, 곡물작미법이라고 해서 공물을 쌀로 바치게 하자, 이런 아이디어를 많이 냈는데 대부분이 제도화되지 못하고 딱 하나 운영되는게 훈련도감 입니다. 직업군인제도죠
중종 37년1542 류성룡은 경상도 의성의 외가에 있는 만취당에서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의 바다를 지키게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서애 류성룡이다
류성룡의 인맥이라는 부분을 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다들 역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날 가을 하늘이 저리도 높고 청아해서 부끄러웠던 걸까요. 류성룡 선생의 기개가 어린 듯한 솟을대문이 되려 안타까웠던 걸까요 . 나라가 대체 뭔가. 답답하고 무지근한 질문 하나 가슴에 얹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한쪽에는 서애류성룡함 관련 기념품들도 판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독설에 류성룡은 이렇게 담담히 답을 한다
함명 서애 류성룡함이 갖는 의미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과 국무를 총괄하는 도 체제사였다는 것,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권율 장군 등 명장을 채용해 국란을 극복한 전략가로 유명하다
선조 37년1604 임진왜란 때 선조의 몽진을 보필한 공을 인정받아 호성공신 2등에 녹훈되었으나, 류성룡은 왕명을 받고 그의 초상을 그리러 온 화공을 돌려보냈다. 이후에는 주로 집필 활동에 전념하다가 선조 40년1607 5월 13일,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분함과 서러움이 가슴 속에서 한꺼번에 치밀어 올랐지만 어쩌겠는가. 군권을 장악한 것은 조선이 아니라 명군이었다. 류성룡은 몇 번씩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죄했다
옥연정사 방안에 여러 서원들에 대해 설명을 해둔 책자도 있었는데 그 책 까지는 읽지 못하고 와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류성룡 선생이 집필한 징비록의 내용을 바탕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까지의 이야기를 담을 예정인데요. 특히 이 시기에 조정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랍니다
16권본 중에 징비록과 녹후잡기만을 간행한 2권본도 있다. 일반적으로 징비록이라 할 때 이 2권본을 말한다
역사저널 그날 징비록 특집 방송 요약입니다
하지만 류성룡이라는 숨은 인재가 있었기에 이 모든일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류성룡 선생과 그 주변에 있던 인물들로 빼놓을 수 없는 한산도 대첩의 히어로, 이순신 장군도 있구요
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문장덕행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이다
살짝 뒤쪽으로 가서 마루를 훔쳐보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임금이 의주에 머물러 후일을 도모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고 하네요. 역시 충신이예요
현대 옥연정사는 고택 체험으로 숙박을 할 수도 있다 합니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생가인 충효당 입니다. 충효당은 1600년대에 지어졌으며 총 52칸으로 자모양의 안채와 자 모양의 사랑채가 있습니다. 서애 류성룡 생가인 츙효당의 대문인데요, 사진을 보면 솟을대문 안쪽으로 사랑채의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 병사들이 어제 많은 일본군을 죽였습니다. 전세가 불리할 것은 없지만 강 건너에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온통 진흙이 되어서 병사들을 주둔시키기 불편하므로 동파로 돌아온 것뿐이요. 병사들을 푹 쉬게 한 후 다시 진격하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정갈하게 가꾸어 놓은 공간이 참 정겨웠어요. 아침 햇살만 가득한 곳에서 잠시 오늘 아침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먹고 살기 위해 간첩질을 하는 병사까지 생겼다고 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 고작 소 한 마리를 받고 우리 군사의 위치를 일본에 고자질했다. 그만큼 먹고살기 어려운 시기였다. 실제로 이 시기에 굶어 죽는 백성이 있었다는 사실도 이 책에 있다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군량 운반에 지친 노인과 어린 아이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바로 작지만 강한 히어로, 앤트맨입니다
권력에서 자유로운 모습으로 떠나는 그의 부드러운 리더십에 놀랐어요
신나게 돌아다니다가 행사가 끝나자 약간의 허전함과 함께 허기가 몰려 왔다는.그래서 주최측이 제공하는 점심식사를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점검한 것이라고는 겨우 활과 화살, 칼, 창 등 문서로만 존재하는 무기 정도 였습니다
마침 문이 닫혀있었다. 낙동강 지킴이 아저씨 말에 따르면 이 집은 예약 민박을 하는 곳인데, 사람이 없으면 문을 걸어놓는다고 한다. 그래서 류성룡 선생의 집필실을 살피지 못하고 왔다
그렇다면 일본은 침략하지 않을 것 이라고 주장했던 조선통신사 부사 김성일 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명나라의 원군으로 가까스로 반격의 실마리를 마련하게 됩니다
우리의 힘을 키워야 할 것이 당연한 사실입니다
4. 사람은 주위 사람을 보고 닮는다. 자신의 마음의 중심을 잡기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어떠한 환경이 어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은 절대적이다. 라고 창세주 이홍지 사부가 설법하였다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는 참상을 회상하며 그 반성의 기록 징비록을 저술 하였습니다
내일 토요일에 직접 와서 보시면 정말 그 감흥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류성룡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터지고 말았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 단 20일만에 서울을 점령해버렸다. 전쟁이 터지자 류성룡은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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